미국식 증거개시(證據開示)제도를 의미하는 소위 ‘디스커버리(discovery)제도’에 대하여, ‘그 필요성이나 유용성은 인정되지만 우리 민사소송법체계나 재판실무에는 맞지 않아 전면 도입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라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제도에 해당하는 ‘문서·전자정보·유형물의 제출요구’를 제외한 나머지 증거개시 수단들(준비회합, 의무공개, 질문서, 증언녹취, 자백요구 등)은 공판전절차와 공판절차가 엄밀히 구분되어 있는 미국 소송에서나 의미가 있지, 한국과 같은 기일운영방식 하에서는 의미 있는 증거수집수단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식 디스커버리제도를 우리 민사소송법체계 및 실무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그 제도의 기초가 되는 이념뿐만 아니라 핵심수단들이 우리 민사소송법에도 다양하게 구현되어 있어 결코 낯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째, 디스커버리제도는 우리 민사소송법 제1조가 천명하고 있는 민사소송제도의 이상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디스커버리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들이 협력의무에 입각하여 자율적인 증거개시를 한다는 점에 있다. 디스커버리제도의 이념적 근거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FRCP) 제1조는 “법원 및 당사자는 연방민사소송규칙을 모든 소송 및 절차에서 공정, 신속하고, 경제적인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운영하고, 이용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민사소송법 제1조가 공정하고 신속하고 경제적인 소송절차와, 이에 관한 당사자 및 소송관계인의 신의성실·협조의무를 천명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둘째, 미국법상 다양한 디스커버리 수단들은 공정, 신속, 경제적인 재판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민사소송법이 이미 도입한 여러 제도적 수단들과 매우 유사한 것들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할만한 제재조치가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상으로는 잘 정비되어 있으나 우리 민사소송법은 그렇지 못하여 유명무실하다는 것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 미국에서 정식의 디스커버리절차가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준비회합이나 법원주재하의 일정수립회의는 우리 민사소송법상 변론기일에 앞서 변론이 효율적이고 집중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정리하는 ‘변론준비절차’에 비견될 수 있으며, (2) 상대방의 증거개시 요구를 기다리지 않고 의무적으로 일정한 핵심적인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1차공개(initial disclosure)는 자신이 제출할 증거나 증인을 숨기고 있다가 변론이 진행되는 도중에 불시에 제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민사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시제출주의나 집중심리제도의 수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3)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 당사자에게 당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소송에 관한 질문을 기재한 서면을 보내면 상대방 당사자가 선서 하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송부하도록 하는 질문서(Interrogatories)제도는 우리 민사소송법상 구문권제도 및 문서목록제출명령제도에 제재수단을 추가한 정도라고 볼 수 있다. (4) 디스커버리제도의 핵심에 해당하는 증언녹취서(Deposition) 제도는 변론기일이 열리기 전에 당사자들의 주도하에 법정 밖에서 당사자 또는 증인신문을 한다는 면에서 일견 생소해 보일 수 있지만 현행 증인신문제도의 허술함 때문에 소송실무상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녹취록’의 서증 제출과 매우 유사하며, (5) 회신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자백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백한 사항은 법원이 철회나 수정을 인정해주지 않는 한 확정적 증명으로 간주하는 ‘자백요구’제도 역시 자백을 불요증사실로 취급하고 일정한 경우 자백으로 간주하는 한편 문서의 진정성립을 부인할 때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하는 ‘이유부부인’제도와 유사하다.
물론 미국 사법시스템이나 재판제도 그리고 법률시장의 발달정도가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거짓과 은폐는 지양되어야 하고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어야 한다는 당위, 상대방 또는 제3자가 갖고 있는 증거자료들이 법정에 현출되어야 진실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미국식 디스커버리제도는 우리 민사소송법체계에 접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2001년에 시행된 새로운 민사사건관리모델(신모델)을 비롯한 우리 민사소송법 개혁과 맥을 같이한다. 디스커버리제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버리고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위기에 봉착한 민사재판제도를 개혁해야 할 시점이다.
/김주영 변호사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서울대 로스쿨 객원교수